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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칼럼

제목

우정에 관하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8.09.0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4291
내용
김종길의 정신의학(22)


정신분석, 이 뭣고
김 종 길

관계의 속사정

옛날 어떤 아버지가 아들과 누가 더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 내기를 했다. 먼저 아들이 시체를 지게에 지고 깊은 밤에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아갔다.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네. 나를 좀 도와주게나.”친구는 냉담하게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친구를 찾았다. 아버지의 친구는 “어쩌다가...어서 들어오게.” 황급히 숨겨 주었다. 집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삶은 돼지였고 그들은 우정의 잔치를 벌였다. 경쟁이 화두인 시대에 이런 친구는 가능할 수 있을까. 해답은 라디오의 한 CF가 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반가운 동창생을 찾는 통화를 하다가 돈 얘기가 나오자 상대는 전화를 뚝 끊는다. 당연한 반응? 그러나 쓴웃음이 나온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친구의 의미도 진화하고 있을까?

까까머리 시절 매일 나와 붙어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우등생이고 그는 중간 성적이었기에 당연히 한 수 지도하는 기분으로 어울렸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즈음에 그와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참 시시한 문제가 발단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졸업 싸인지를 내가 이웃 여학생에게 돌렸다며 놀려대기에 아니라고 했다. 챙피해서 오리발을 내밀었건만 자꾸 맞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나는 화를 냈고 그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비는 마침내 자존심을 건 결투로 발전했다. 일요일 오후 우리는 학교 미술반 교실의 창을 타고 넘어 들어가서 대결을 벌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까까머리들은 씩씩거리다가 마침내 레슬링으로 돌입했다. 친구는 나보다 키가 작았고 힘이 부쳤기에 내 밑에 깔려서 숨을 몰아쉬었다. 서로가 아까웠는지 주먹질은 피했고 힘겨루기에서 그가 졌고 나는 일어섰다. 검정색 중학 교복이 먼지 가득한 시멘트 바닥을 뒹굴었으니 둘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어색하게 웃고는 헤어졌다. 나는 사과했고 다음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울렸다. 내 기억에 남은 유일한 싸움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는 껄렁한 패들과 어울렸다. 관계가 소원해지고 졸업 후에는 몇 년에 한번쯤 만나는 정도였다. 고교 졸업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다시 만났다. 행사가 있은 후 다른 친구가 들려준 말이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나는 분명히, 변함없이 그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는 나를 뒤에서 돌보느라고 신경깨나 썼노라는 얘기였다. ‘날 돌봐 줬다고? 웃기네, 그 녀석.’그 친구가 들었다는 말의 내용이 내 가슴에 꽂혔다. 허약한 나를 보살피느라고 노력한 이유가 있었으니 나의 어머니께서 그에게 당부한 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종길이는 시골에서 왔으니까 친구도 없다, 니가 좋은 친구가 되어 잘 보살펴 다오.”그래서 충직하게 나를 보살펴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오래 반추하였다. 어머니의 사랑, 친구의 사랑. 나는 친구관계의 한 면만을 보아온 바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적이 무슨 대수라고 그를 깔봤다는 말인가. 얼마나 철없이 교만했던가. 반세기가 지나서야 겨우 깨달았다니 부끄러웠다. 나의 어머니는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고 그는 헌신적으로 밤새워 나를 도왔다. 작년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들었다. 영전에서 나는 한참 눈물을 쏟았다.






추억여행

<천년약속>은 부산에서 만나는 에세이스트 글공부 모임이다. 지난 모임에서 한 회원의 글에 친구 이야기가 있었다. 그 부분을 살펴본다. (실명은 생략하고, 지면을 위하여 생략부는 ...으로 대신한다.)

친구는 중, 고, 대학까지 함께 다닌 동창... 단짝친구가 되었다. 사춘기 이후의 숱한 추억을 함께 한 친구. 그러나 결혼 이후론 더 이상의 비밀을 공유하지 못한 친구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며칠 전 '우리 만나서 한잔 할래‘ 문자가 왔다...남포동에 내려 일부러 광복동 입구서부터 걸어가고 싶었다... 엄마가 부르는 유행가만 듣고 자란 내가 클래식을 잘 알던 그녀에게서 느끼는 열등감을 만회해 보려고 가끔 찾았던 ‘필하모니’감상실이 있던 곳이다...크리스마스 날이면 구두쇠인 아버지가 딸들에게 커다란 케익을 사주시던 제과점‘고려당’은 여전히 고맙게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송승환의 ’까페 떼아뜨르‘가 있던 대각사 뒷골목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찡해 왔다...그동안 잊었던 나의 옛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 입에서 ‘니 그동안 상했네.’하는 소리를 듣게 될까봐 친구를 만나자 마자 옛날처럼 팔짱을 끼며 나가자고 했다... 흐릿하므로 더욱 아름다운 시간을 그리던 그때,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오신 교양 있는 엄마를 둔 친구의 전화기가 진동으로 울렸다...친구의 예쁜 얼굴이 전화를 받으면서 점점 뚜렷한 윤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동그란 눈매는 마름모 모양으로 각이 나오기 시작하고 붉은 입술은 양끝이 축 처지면서 열린 입에서 순간 앙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그녀가 조금 전 나에게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자랑하던 아들에게서 온 전화였다. 다년간 몸에 밴 교육자의 체면에 나름 주위를 의식한 듯 작은 소리를 내려는 배려는 보였으나 내 귀엔 최대한 압축된 고주파로 파고들었다. 함께 구름에 얹혀있던 나는 그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며 다시 내 자리로 ‘툭’ 떨어졌다...

내가 아는 그녀는 표준말의 예쁜 말씨를 쓰는 여자이다... 중학교 때 합창단원으로 스웨덴까지 다녀온 고운 목소리를 가진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부산의 여느 중년 아줌마들처럼 자기 아들에게 앙살스럽게 야단치는 모습을 보니, 전혀 교양 있어 보이지 않는 고음의 잔소리를 따다다 늘어놓는 모습을 보니 새삼 내 모습을 보는 듯,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 정겨워서 큰 소리로 깔깔대는 웃음이 나왔다...내 여행에 등장하는 옛 친구들, 다들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한번 씩 만나고 싶구나. 그리움도 나이를 먹는다고?

(글이 낭송되고 박수를 받고, 좌중의 반응을 본다. 글쓰기의 비평도 보면서 친구에 대한 작가의 기분을 음미해본다)
조; 남포동의 추억을 되살려 주어 고맙습니다~(왁자지껄, 남포동 풍경 추억 이야기들)
김A; 뭘 쓰려 했지요? 친구? 무상? 여자 친구를 시샘, 친함, 부러움, 심리변화...풍경만
서술하다가~ 너무 길어, 요약해서 중편 수필이나 심리변화를 주제로 쓰는 게 어떨까요.
작가; 남포동은 내 아니라도 쓸 수 있겠고~~ 친구, 모든 장면에서 그녀가 있었기에...
지도교수; 남포동 얘기는 확 줄이고 친구 얘기를 살려야지요. 그 친구 없이 추억을 말할 수
없어요.
김B; 수채화 식 그림만 열거...자기 생각이 별로 없어.
김A; 작가의 두 번째 글을 본다. 기억에 대한 상세한 나래이션은 좋아요. 문제는 더듬기만
아닌, 일기가 아닌 것으로, 내 글이되 독자에게 공감되는, “내가 얘기 할 것이 뭐냐?”
우정, 열등감, 시샘, 잘 나와서는 구렁이 담 넘듯 해버려. 플럿을 짜고 굴곡을 주며 앰
팩트를 주어야.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슬슬 넘어가 버렸어. 나열만. 그건 작품은 아냐.
주제가 뭔가요? 하나에 초점이 필요한데.
지도교수; 친구를 7,8년 간격으로 만나는 이유라도? 현재는 얽히는 20대의 추억에 그녀와...
작가; 항상 그 친구를 생각해요.
지도교수; 친구가, 그 노래도 잘하는 친구가 아들에게 꽥꽥하는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다?!,
바로 내 모습. 꿈속의 그녀가 나와 같다! 내가 오늘 확인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게
내 가슴에 남아 있지만. 그리움도 나이가 들어간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해요.
작가; 그냥 썼는데...주제가 있어야 합니까?
지도교수; 내 좋아서 썼는데, 그렇다면 일기를 써야지.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의무가 있어
요. 독자에게 빚지는 것. 왜 여태까지 수필이 무시돼 왔는가? 아무도 작가와 그 친구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독자에게 궁금하게 해 주어야 해요. 그게 의무, 문
학으로 만들어 놓아야 해요.
조; 제목을 <그리움도 나이가 들어간다>하면 어떨까...
지도교수; 친구가 아들에게 야단치는 모습, 추억에서 멀리 떨어져 왔어~ 그것이 있었기에
지금 나의 사색이 필요한 거야. 남포동 얘기를 글로? 별 의미가 없어요. 쓰다보면 그것
에 속아서 쓰게 돼요. 이건 ‘자기만족’일 뿐.
김C; 글쓰기를 통해 자가치료를 하지요. 바로 이런 경우. 작가의 초기 작품들에서 열등감의
문제가 들어나요. 남포동 거리 얘기는 패션이고, 옷이지요, 옷을 입고 있는 몸통의 기원
적 뿌리는 형제경쟁(sib rivalry)이지요. 지적통찰을 얻고 글을 쓰면서 성숙해지는
것이지요...
작가; 백만 년 전부터 근본적으로 그 친구는 양반이고 난 상놈이어서, 따라갈 수 없는...
지도교수; 추억여행으로 가지 말고 친구와의 관계를 주제로 해요.

수필 작가가 되고자 글을 쓰면서 ‘뭐 주제가 있어야 하나요?’ 하는 물음은 순진무구하면서도 당황스런 의문이 아닌가. 혼자 쓰며 즐기면 그만이지 작가가 되어 뭘 한다는 말인가? 작가는 결국 자기의 무의식적 소망과 그에 대한 자신의 심리반응을 독자에게 보여주게 된다. 잘 쓴 글일수록 독자를 무의식 속에 있는 에디프스적 소망의 일면을 강열, 격렬하게 나타내어 독자를 무의식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가 없는 작가의 행위는 의미가 없지 않는가. 남에게 보이고자 한다면 주제는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작가는 저항한다. 자기도취적 자유를 주장한다. 많은 주제 가운데 이 글에서 작가는 무엇을 선정할까. 그것이 문제이고, 가장 좋은 방법(좋은 글쓰기)을 통하여 나를 들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자기도취, 과시욕망, 교류, 사회적 요구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여서 글은 탄생될 것이다. 글쓰기는 보이는 행위이지만 무엇이라고 하는 주제는 숨은 욕망이다. 그것을 들어내면서 의식의 세계는 확장되어 갈 것이다. 작가는 ‘주제 따위가 뭐 필요하냐?’는 저항의 기분을 넘어서 점차 성숙해 질 것이다.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욕망, 그 밑의 주제가 심리적 변화에 대한 지적 통찰이다. 그런데 작가는 친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백만 년 전부터 이미 카스트 계급 같은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무거운 운명적 선입견이다. 그렇게 유년과 청소년기를 그 친구와 함께 하였다. 친구는 부러움과 동일화하고픈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아줌마가 되고서 신경질 내는 친구의 모습에서 작가는 현실을 깨닫는다. 현실의 생, 그것은 우정의 껍질과 전혀 다른 것인 줄 알았던 관계의 깨달음이다. 마치 내가 어린 시절의 친구에게 단지 성적이 좋다는 지적 우월감으로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것이 우정인 줄 착각하였듯이 그녀는 사회적 열등감 속에서 우정을 맺었다. 나는 정서적으로 친구는 지적으로 서로에게 보상적 관계를 맺은 셈이다. 나이가 들고야 깨닫는다. 우정은 그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는 원초적 힘이 담긴 뚝배기 같은 그릇이기에 누구나 그것을 사용하는 데 별도의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그 속에 담겼던 삶의 의미를 이제 그녀가 깨달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운명의 별자리

형제나 친구라는 인연은 어디서 오는가. 우주의 우연적 확률을 누가 답할 수 있으리오. 장남인 K 군은 아버지가 스님이었다. 그는 강박적인 성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자이다. 나이가 40이 되어도 여자를 사귀어 본 경험이 없고 앞으로도 생각이 없다. 엄격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엄격한 자기 통제의 가치관을 물려받아서 자기 통제에 엄격하다. 술을 먹고도 남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일이 없다. 강박증, 원인을 모르는 분노가 숨어 있다. 그 뿌리에는 과보호에 대한 무의식적 분노가 있는데 아직 그는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직도 증상을 갖고 살며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에 동생은 여자라도 매우 활동적이고 씩씩해서 외국 유학을 다녀온 대학의 교수님이다.

‘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부모가 양육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곧 사랑의 역학 관계가 어떠했느냐 하는 질적 내용과 관련이 있다. 순한 아니, 까다로운 아이, 반응이 느린 아이 등 기질적으로 타고나는 게 다르다. 아이에 맞추어서 엄마와의‘애착’이 잘 조절되어야 원만하게 발육한다. 그래야 후일에 관계 형성을 잘 한다. 남아선호 같은 편중된 사랑은 형제간의 이간을 일으킨다. 문제아를 만들고 친구관계도 원만치 않다. 적절한 상호 의존을 하는 능력이 친구 관계에서 중요하다. 이런 인간관계의 기초는 친구는 물론 부부나 사회관계까지 작용한다.

카인과 아벨의 갈등이 살인의 비극을 초래하였듯이 형제서열의 갈등은 일생을 지속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오줌을 잘 가리던 아이가 아우를 보면서 다시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현상, 일명 ‘아우 탄다’는 형제갈등, 원초적 질투의 증거물이다.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에 혼자서 끓여 김치를 동무해서 먹는 라면의 맛이 일품이었다. 우정이라는 주제를 일상에 끌어내려 죄송하나 우정은 마치 라면과 김치의 끝내 주는 입맛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인생의 맛, 누가 김치가 되고 누가 라면이 되거나 간에 인생의 맛은 그 둘의 합일점이 아닐까. 그 인연을 누가 말릴 수 있겠나. 김치의 내용을 구성하는 속사정, 라면을 구성하는 속사정이 과학적으로 분석되기는 해도 입안에서 보여주는 합일의 맛 덕분에 인생은 살맛나는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나의 친구는 둘째였고 형님이 사랑을 독차지 하였기에 우리집에 와서 나와 노는 걸 즐겼을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랴, 그와 내가 친구이고 우정을 나누고 있음이 중요한 것. 그런데 정말 묘한 것은 우정이란 게 주판알을 튕기는 계산을 하면서는 발효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철부지의 나이에 어울림, 거기에서 원초적 정이 길들여진다는 사실은 정말 흥미롭다. 나이가 18세가 되어야 뇌파가 완성되기에 그 나이까지 뇌 속에 진솔한 우정의 지도가 완성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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